현대자동차에서 대법원의 판결조차도 기만하고 헌재에 소를 제기하는 꼼수 속에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철탑에 오른 두 청년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요즘 내 삶의 답답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좀 생각하고 털어내려 충동적으로 울산행 희망버스에 올랐다.
0. 대한문
지하철로 12분정도면 도착하는 그 곳엔 인도 위에 공원이 있다. 공원(?)관리를 하는 공공근로 어르신들이 몸빵용 용역으로 그 곳을 지키기 위해 있다. 그 곳은 한 공장에서 일어난 자명한 그러나 의문의 연쇄자살사건을 몇년간 추모하는 분향소가 있던 곳이었다. 공원이 생기고 나는 꽃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대한문 앞은 수문장 교대식보다는 언제나 경찰을 마주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불필요한 마찰도 수시로 생기고, 그런 것에도 지치고 익숙해지는지 분노 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 곳은 수도 한 복판에서 권력이 시민을 '감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곳이다. 명문대 학생의 자살과는 너무나도 다른 노동자의 자살에 대한 사회의 대응을 보며, 이들의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1. 박노자
함께 가기로 한 친구덕에 그의 버스로 결정했고, 그와 대한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례가 맞지않는 긴 다리, 생각보다 나온 배, 곰처럼 큰 덩치가 첫 인상이었다. 그간 신문에서 얼굴만 나온 사진을 보아왔기에, 그의 첫 인상에 얼굴이 얼마나 비중이 없었던지 놀라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놀란건 그의 목소리. 어느 희망버스 승객의 말처럼 '이다도시' 이후 인상적인 목소리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어설픈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연예인의 연예인처럼, 그를 만나 설렌 어느 교수님의 모습마냥 그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이번 방한의 주목적은 한국의 군사주의에 대해 종교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합과 관련성에 대해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그 와중에 희망버스 참석, 맑시즘 2013 등 다양한 일정들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버스안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그의 견해와 원인 분석, 그리고 다른 사회와의 비교와 소련사회의 삶에 대한 강의가 무척이나 즐거웠고 신선했다.
그는 자신의 비정규직 경험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한국의 비정규직 상황에 대한 강의를 했다. 비정상적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독특한 상황은 한국 자본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강한 자본인 선진국에서는 비정규직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그러면서 비정규직 양산의 근거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로 나누어 설명했다. 정치적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진보적이라고 인식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집권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상층부와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오히려 반노동적인 정책들을 부드럽게 입안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었다. 보수정권이었다면 이런 정책들이 더욱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을 것이라며, 미국에서도 레이건 시절보다 클린턴 시절에 복지정책이 더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한국의 거시적/미시적 '주문'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거시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이라는 논리와 미시적으로는 '출세/성공'이라는 담론이 결합함으로써 비정규직을 낳게 하고, 그에 대한 차별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모습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늘상 궁금했던 '계급배반'과 노동자 계급의 '자기부정'에 대한 부분을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차별 대우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문제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문제는 더 이상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 전체의 문제이자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지금은 비정규직 투쟁의 초기라 '정규직 전환' 등의 수세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앞으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문제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며 노동자의 경영참여, 경제민주화, 정치 세력화가 달성될 것이라고 긴 안목을 제시했다.
이후 있었던 질의 응답 중에 '어설픈 자유주의'를 어떻게 '청산'해야 하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시크하게 답했다. 상황이 더 어려워지면 그들 스스로 알게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더 안좋아져야 할까. 나는 '그 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 백번 공감하는 일인이었다. 그리고 소련에서 살았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환상이 없는 답변이 현실적으로 위안이 되었다. 대안을 내지 못하면 반대를 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보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다음 단계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마르크스의 책에 사회주의는 어떻게 작동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답을 내린 것도 없고, 러시아 혁명은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치밀하게 계획하고나서 완수한 것이 아니었다. 조급증은 버리고, 작은 것 하나 하나를 통해 큰 물결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 울산
노동자의 도시이자, 대기업의 도시인 울산은 한 때 노동의 성지였다. 정치꾼들이 아닌, '노동자'를 대변하고자 했던 유일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출신 첫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장을 뽑았던 곳이었다. 나는 울산의 공장을 처음 보며 놀랐다. 걷는데 10분이 넘게 걸리는 주차장을 보며 과연 담장 너머 공장은 얼마나 거대한 곳일 것인가 하고 말이다. 내가 맞닥뜨린 자본의 물리적 크기였다. 삭막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거대한 공간에서 사람은 기계처럼 일한다. 박노자의 말을 인용하면 지금 한국의 노동시간은 중세 농노나 수용소 수용자의 노동시간보다도 길다고. 이 곳은 16000명의 비정규직에게 일을 시키고, 이들이 정규직으로 받아야 한 돈을 부당이득으로 취하며 성장하고 넓힌 회사의 공장부지인 것이다. 착취의 현장이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공장의 후문이었다. 먼저간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방송을 들으니 정문앞 '몽구산성'에서 가스통을 들고온 고엽제 분들과 대치하고 다른 곳에서도 경찰과 대치하다가 이곳으로 모였다. 공장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처음 와본 장소라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나는 철탑을 보았다. 김진숙의 85호 크레인과는 또 다른 곳이었다. 에펠탑처럼 앙상한 뼈대에 사람이 발뻗을 곳 조차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은 280일 농성중이다.
이들이 농성하는 이유는 구구절절히 적을 것도 없겠다. 이렇게라도 사람이 살아야 하나 싶지만, 그런 기가찬 질문조차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한국 사회다. 하수 시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더욱 무서운 병들이 창궐하는 것처럼, 사회의 곪은 부분들이 보통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본이, 재벌이, 조폭과 다를 바 없는 이유다. 어떤 동네에 조폭이 있다면, 그들에 의해 굴러가는 그 지역사회의 경제부분이 있다. 검은 돈 흰 돈이 따로 있나.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현대자동차가 마치 그들과 무관하다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위선이다. 이들의 순이익에서 얼마가 비정규직을 착취하여 얻은 것일까, 공장을 보며 생각한다. 늘상 입법취지는 이해관계자의 입김에 의해 누더기 법안이 되기 마련이다. 파견법이 만들어질때도 그랬다. 그 누더기 파견법에 의해서도 불법을 10년 넘게 자행한 한국 유수의 기업, 불법기업, 현대자동차다.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받아야 할 돈, 회사가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지출해야 하는 부분을 이들은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받아서 써야 하는 것을, 지역경제에 다시 숨구멍을 불어야 하는 것을 현대차는 움켜쥐었다. 큰길 사거리에 있는 하이마트에는 '현대차 복지카드 가맹점'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비정규직도 받았어야 하는 복지카드를 보며 이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를 친구와 생각했다. 울산은 노동자의 도시이자, 자본의 도시였고, 자동차의 도시이자, 차별의 도시였다.
3.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회
내가 이들을 만난 건, '밥꽃양'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이다.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킨 97,98년은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회사의 구조조정에 맞서 다 함께 투쟁하던 노조였다. 그리고, 이들은 회사의 정규직 인원 쿼터에 대응하여 식당 아주머니들을 자른다. '밥꽃양'이라는 말은 '밥하는 아줌마, 투쟁의 꽃이었다가 희생양되다'라고 풀어쓸 수 있다.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 한심하고 답답하다. 이들은 무능했다. 다른 노조 참가자들과 학생들이 맨 앞에서 공장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이들은 나와 함께 맨 뒤에 있었다. 부끄러워 깃발을 내릴 법도 한데, 그러지는 않는다. 무슨 전략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회사 뒷문으로 가는 긴 길에 대오를 정비하자, 회사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공장 안 철망에 왔다. 구사대인가 싶었다. 저들은 노조원인가, 아닌가. 아니면 회사원인 척 하는 용역일지도 모르지 라고 위안을 삼았다. 시간이 지나고 연기가 난무하다. 앞에서는 부상자가 속출하고 앞으로 모여 힘을 모으자고 하는데, 이분을 요지부동이다. 가족 단위로 참가한 사람들처럼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어쩔줄 모르는 남편 마냥. 자기 일이라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건가? 앞으로 나가 열심히 진입을 위해 노력하든, 아니면 중재를 하든 이들은 무언가 했어야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철탑 위 두 사람이나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동료, 그리고 정규직 자신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예전에 가장자리 인문학 강연에서 현대차 비정규직과 함께 한 활동가의 말이 귀에 맴돈다. 공장 내 이상한 신분제. 어린 정규직원의 나이많은 비정규직에 대한 짧은 말은 이들의 오묘한 관계를 대신한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조를 대리한 것도 아니고, 대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위치가 어설퍼 슬픈 자유주의자들 마냥, 이들의 위치도 어설프다. 노동의 파편화 전략에 맞서 연대가 아닌 움켜쥠을 선택하고 배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에 발 밑에 닿는 모든 것은 떨어뜨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저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나의 나약함과 연결지으니 이들이 더욱 측은하다.
4. 폭력
시위를 하면 으레 따라오는 말이 폭력시위, 변질 등이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폭력이 오고갔다. 다친 사람도 있다. 폭력이 아니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폭력이 있었다고 희망버스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력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시위에서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이 있고, 언어폭력, 권력폭력, 경제적 폭력, 구조적 폭력 등 다양한 것이 폭력이다. 힘을 앞세워 어떤 행동을 가하는 것. 그것도 선택의 여지 없이 손발 다 묶인 상태에서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16000명을 십년간 비정규직으로 부리며 그들이 챙긴 엄청난 액수의 부당이득 앞에서, 대법원 판결에 따른 생생내기용 3000명 '신규채용'을 하겠다는 말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들의 말을 따르자면 3000명은 자신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나머지 13000명은 그 무엇도 아닌 지금의 상태(불법 고용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사람은 구조앞에서 무기력해지기 마련이다만, 그 구조를 만든 것 또한 사람 아니던가. 자신은 책상 앞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그 일의 결과 수십만의 유태인이 학살당하게 되었다면, 그 것은 단지 '일'일 뿐인 것일까, 폭력을 행사한 것일까.
나는 주차장 길 위에서 일어난 그것만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만으로 분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토록 분노하게 된 원인에 대해 분노하고 싶을 뿐이다. 소화기 가루에 눈앞 10cm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먼저 소화기를 쏘았네, 물병을 던졌네.. 이런 것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좀 더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판단하고 싶었다. 흥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벤치 클리어링 같은 상황이기에 함께 미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지만, 미비한 준비 탓과 겁에 질린 일행이 있어 앞에 나가지는 못하고 방관자처럼 있었다. 공장으로 들어가겠다는 목표 앞에서 우리는 정말로 밀었어야 했는지, 보여주기만 하는 정도면 됐었는지, 나는 아직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전술에는 오류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들어가는게 목표였다면 차로 담장 받고, 그 차위로 시위대를 올려 들어가는게 맞는 전략이었겠지. 피해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시위 대오 스스로 비폭력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거나, 비폭력에 대한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5. 문화제
주차장 후미진 곳에서 날아오는 소화기 가루에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는 것을 보다가, 철탑으로 향했다. 분위기는 가라앉는 것 같았고 당이 너무 떨어졌다. 부산 영도에서 일박에 십만원을 썼다는 지인의 기억과 공장 주차장에서 다섯시간 가량 물과 쭈쭈바 하나로 버티며 화장실도 못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피식 났다. 철탑으로 가다보니 문화제 무대가 있었다. 동무들과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여전히 앞에선 대치 중이었지만, 곧 끝나리라 생각하고, 밥차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문화제는 언제나 즐겁다. 포차에서 먹을 거리를 사서 함께 먹고 공연도 보고, 소리도 지른다. 나도 모르게 후덜거렸던 다리가 괜찮아졌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살아있다. 이 공간이 있어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인이 보내준 기사를 보니 기가 찬다. 술이.. 고성이... 라는 식으로 삐딱하려고 작정한 기사를 썼다. 이 사람 눈엔 이슬만 먹고 살아도 제대로 된 기사를 쓰지 못하겠구나 싶다. 함께 하룻밤을 보낸 친구도 조선일보의 기사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화가 난다고 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업 출정식 주변에 벌어진 술판을 삐딱하게 보았던 예전 내 모습을 생각했다. 비장해야할 이 자리에서 이 분들은 뭘 하는 건가. 파업이 장난인가?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말로 면피하기 보다는, 이들도 노동자이기에 앞서 인간이라고 보인다. 이들이 파업을 수시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긴장감이 생길 수 있다. 무서울 수 있다. 심심해서 먹을 수 있다. 벗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이런 일이 있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기자에게 묻고싶다. 2시 즈음에야 점심을 먹었던 나는 10시까지 기다리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맥주와 순대와 초계무침을 먹었다. 그게 문제인가.
6. 2008 VS 2011 VS 2013
공교롭게요 요즘 나는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를 읽고 있다. 책에는 2008년 광우병 정국에 나왔던 범국민적 촛불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국민의 열망이 커지고 사그라드는 과정, 지금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를 읽었다. 그리고 2011년 한진 중공업 희망버스를 타지못해 발을 구르며 아프리카 티비로 밤새 생중계를 보며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철탑 위에서 함께 살자고 외치는 사람을 보고 있다.
울산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승객 모두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들을 투사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얼른 내려와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될 수 있게 힘내겠다고 했다. 2008년의 여름처럼 흐지부지하지 말자. 천천히 즐겁게 함께하자. 2011년처럼 그를 영웅으로 만들지 말자. 메시아도 아니고, 우리의 대변인도 아니다. 그들을 통해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기대고 싶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자신들이 자신의 주체가 된다면, 그것으로 이 버스의 목적은 달성을 넘어선 것이다. 정신승리라기 보다는, 이런 경험들이 각자의 삶을 바꾸어 파편화된 사람들이 우리가 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몹의 질적 변화. 그래서 언론의 왜곡에도 나는 상처받지 않기로 한다.
7. 사람
나는 궁금했다. 내가 왜 시청앞 국정원 촛불에는 무관심한지를. 그리고 올라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우리가 믿을 것이 사람 뿐이라면, 사람 곁에 우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1000차 수요집회에서 왜 민족주의적 구호가 나와야 하는가로 시크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내가 나의 시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과 따로 다니느라 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 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너무 피곤했으니까-
사람만이 희망이다. 나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