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ce Re:: 대전-2. 성심당과 칼국수의 도시
2박 3일의 일정에서 2일의 역할은 막중하다. 하루를 완전히 여행에 집중할 수 있는 하루이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할 것들을 찾아보다가, 엑스포공원, 과학관, 미술관, 수목원, 38층 전망대 등이 마음에 들었다. 때마침 위치도 서로서로 가까우니 동선이 꼬일 걱정이 없었다. 튼튼한 두 다리를 준비하라며 짝꿍에게 미리 엄포를 놓았다.
이번 여행은 날씨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실내 위주로 다녔다. 마침 이응노 미술관에서 탄생 120주년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작품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표를 끊고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작품 '군상'을 보고 앗 이 그림! 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분의 시대별 주요 작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다니. 서양에 몇 십년 살면서도 붓과 먹이라는 재료를 놓지 않고, 동양화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끊임없이 작품에 다양한 시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50년이 지난 그림이 왜 촌스럽지 않은지 나이가 드는데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 내가 만약 대나무를 곧잘 그리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면 문자화 등을 시도하려고 했을까? 전시회장에 가면 화가 등 예술가들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그 마음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입장료 1000원에 이런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갑천을 지나 추억의 엑스포 다리와 한빛탑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아침 배가 덜 꺼진 탓에 한빛탑을 가기로 했다(오늘의 실수 1). 93년 엑스포에서 사람구경하다가 기념품으로 손수건만 여러장 사고 왔던 기억이 났다. 그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탑 안에는 올라가 볼 엄두조차 못냈던 한빛탑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꿈돌이 꿈순이를 지나 무료일까 아닐까를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내소에 사람이 없었다. 무려 무료다! 엘리베이터에서 탑 안쪽이 보이게 창을 냈는데 마치 닥터 후 세트장 같은 느낌이 나는 곳이 1층에 있었다. 올라가서 한바퀴 돌고, 내려와 오씨칼국수를 가던 도중 성심당DCC를 보게 된다. 대기줄이 없는 성심당이라니! 어제 그 광경을 본 우리는 저절로 빵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오늘의 실수2). 문앞까지 가서 보니 역시 안에는 빵접시를 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칼국수를 먹고 여기서 저녁먹을 빵을 사자며 쿨하게 나왔다.
오늘의 칼국수는 오씨칼국수. 동선상 본점은 못가고 도룡점을 갔다. 도착해보니 이미 가게 앞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비슷하게 도착한 사람들을 비집고 얼른 번호표를 뽑아들었다. 대기표 105번인데 아직 60번대였다. 칼국수니까 금방 빠진다고 어디서 본 것 같고, 이거 먹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줄때문에 포기하기엔 싫은 마음이 있었다. 비 바람 추위를 피하려고 큰 상가 건물을 한 바퀴 돌고 나니 70번대다. 좋아! 이 정도면 금방 빠지겠어! 싶었는데, 그 뒤로 번호가 빠지지를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우리 차례가 왔다. 2시가 넘었고, 밖은 여전히 비 바람 추위로 칼국수 먹기에 최적의 상태가 되었다. 어제의 후회를 교훈삼아 오늘은 주문한다. 칼국수 1, 물총탕 1, 해물파전 1. 먹다보니 밀가루가 풀리지 않은 물총탕에 밥 말아 먹는 맛은 어떨지 궁금해서 공기밥도 1 추가했다. 90%이상 다 먹고 나온 건 안비밀.
여전히 물총탕은 조개류의 평양냉면 같은 슴슴하고도 시원한 맛을 내뿜었다. 이 곳에도 면을 쉴새없이 뽑고있는 할머니 제면사가 보이는 제면실 안에 있었다. 면발이 어제보다는 조금 더 두꺼웠지만, 설익거나 밀가루 맛이 많이 나지는 않았다(어디까지나 내 입맛 기준). 춥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씨의 버프를 받아서 더 맛있게 먹었고,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 나름의 맛이 좋았다. 아, 이정도 맛을 내지 못하면 대전에서 맛있는 칼국수집이라고 이름을 내밀지 못하겠구나. 줄서는 곳이 아니더라도 에지간하면 칼국수가 맛있다는 평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전라도에 가면 백반집에 반찬이 한바닥 벌여져 있지 않는 식당에는 사람들이 안간다는 것처럼, 대전에서는 이정도는 해야 칼국수를 돈주고 사먹겠구나 싶은, 칼국수의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곳 같았다. 대전은 칼국수의 도시라 불러도 마땅하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성심당으로 다시 향했다. 아까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우리의 성급한 자만이자 욕심이었다. 비록 어제 본점 같은 줄은 아니었지만, 성심당은 성심당인걸. 30미터가 넘는 줄을 지나치며, 오늘도 성심당은 지나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했다. 오늘의 실수들을 생각하면 맛집을 앞에두고 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짧은 줄을 보고도 방심할 수 없는 법. 그래도 성심당만을 위해 남겨둔 내일이 있다. 생각만 같아서는 오늘은 2만보, 3만보를 걷고 싶었다. 위에 쓴 것처럼 수목원만 걸어도 만보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을 가서 여기저기 다니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걷다보면 어느새 장딴지가 뻐근해지고 발바닥 아치에서 통증이 느껴질때가 있다. 그 느낌을 기대한 오늘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 다니는 것이 아니고, 날씨도 추우니 포기할 건 포기할 수 밖에. 원래 계획은 오후에 과학관을 가고 저녁까지 밖에서 먹고 야경을 39층 카페에서 보는 것이었지만, 과감하게 쳐냈다.
야경은 포기했지만 공짜 전망은 포기할 수 없다. 한빛탑도 무료, 38,39층 카페를 가기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는 오노마 호텔도 무료. 우리 집도 아니고 투숙객도 아닌데 좋은 건물에 들어와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건 기분탓일까. 최근에 지은 40층 건물의 39층에 폴바셋과 이탈리안 식당, 38층에 스타벅스가 있었고, 38층은 아래층이 객실인 점을 감안하여 저녁 몇 시 이후에는 의자와 탁자를 끌지 말라는 간곡한 메시지가 곳곳에 있었다. 시선의 권력이라는 말처럼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려다볼 수 있는 건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한 맛도 있고. 사람들이 전망을 두루 볼 수 있게 건물의 테두리에 모두 좌석을 배치한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한바퀴 둘러보았다. 밤에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국립 중앙 과학관은 거대한 놀이터였다. 역시 '국립 중앙'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4글자가 보이면 어디든 그냥 들어가면 된다. 자연사관, 인류관, 과학관(2층 무슨 관은 공사중이라 1층만 갔다.) 처음 들어간 자연사관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서 그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월석과 아폴로 호에 붙어 달에 다녀온 빛바랜 태극기가 인상적이었다. 인류관부터는 시간과 체력에 쫓겨 후루룩 보고 나왔다. 팁을 더하자면, 시간을 잘 맞춰가면 어린이 몇 명을 데리고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셨고, 과학관 1층은 인천 월드컵경기장에 있는 과학관과 비슷+ 추가 전시 내용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물총(동죽)과 면발의 매력을 깊이 느낀 날, 어쩌다보니 성심당 2번째 장소까지 방문하게 되었다. 지도에 찜은 해놨는데 정말로 다녀올 줄 몰랐다. 성심당은 역시 성심당이고, 대전은 성심당이자 칼국수다.